갈라디아서 2:1-21

2  그러고 나서 14년 뒤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디도도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고 있는 좋은 소식을 형제들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크게 존경받는 형제들에게 따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이미 한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있던 디도는+ 그리스인이었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며시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에 그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종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염탐하려고 슬그머니 들어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양보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소식의 진리가 여러분과 계속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므로 그들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내게 상관이 없는데) 크게 존경받는 그 형제들은 나에게 어떤 새로운 것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소식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소식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고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을 베드로에게 주신 분이,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나에게도 능력을 주셨는데)+  나에게 과분한 친절이 베풀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둥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나바와 나에게+ 뜻을 함께한다는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방 사람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10  다만 그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게바가+ 안티오크에+ 왔을 때에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했습니다. 그가 명백히 잘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그가 이방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하자, 그는 할례받은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더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 사람들을 멀리했습니다. 13  나머지 유대인들도 그를 따라서 그런 가식적인 행동을 했으며, 그리하여 바나바까지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에 휩쓸렸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좋은 소식의 진리와+ 일치하게 걷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게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째서 이방 사람들은 유대인의 관행에 따라 살게 하려고 합니까?”+ 15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며, 죄인인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8  내가 이미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 자신이 범법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느님에 대해 살아 있기 위해서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둥에 못 박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지금 육체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의가 율법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각주

직역하면 “한 시간”.
또는 “정죄받을 일”.
또는 “죄의 봉사자”.
또는 “내팽개치지”.

연구 노트

그러고 나서 3년 뒤에: 바울은 자신이 개종하고 3년째 되는 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는 기원 36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 같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예루살렘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14년 뒤에: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은 만 14년 뒤가 아니라 “14년째 되는 해에” 즉 “햇수로 14년이 되는 때에”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 있다. (왕상 12:5, 12 비교. 갈 1:18 연구 노트 참조) 그 기간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인 기원 36년부터 그가 디도와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함께 할례 문제를 논의한 때인 기원 49년까지인 것 같다.—행 15:2.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는 나오지 않는 점을 언급한다. (행 15:1, 2)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할례라는 중요한 문제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가져가도록 계시를 통해 인도하신 것 같다. (엡 5:23) 이 역사적인 모임은 기원 49년경에 있었다. 바울은 그가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던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이 계시를 언급했다. 예수께서 바울에게 직접 임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시를 통해 그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진정한 사도라는 점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갈 1:1, 15, 16.

전파하고 있는: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기본적으로 “공식 사자로서 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선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마 3:1 연구 노트 참조.

전파하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기본적으로 “공식 사자로서 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선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

할례를 베풀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 15:6-29) 디모데의 아버지가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바울은 그들이 전파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될 유대인들 중 일부가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전파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으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함으로 바울과 디모데는 좋은 본을 보였다. 후에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내가 유대인을 얻으려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고 한 말과 일치하게 행동한 것이다.—고전 9:20.

그리스인: 기원 1세기 당시에는 그리스어 헬렌(“그리스인”)이 그리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조상이 그리스인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인”과 “유대인”을 함께 언급하는데, “그리스인”이라는 표현을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롬 2:9, 10; 3:9; 10:12; 고전 10:32; 12:13)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분명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져 있고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디도는 …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크에서 할례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기원 49년경) 디도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행 15:1, 2; 갈 2:1) 디도는 “그리스인” 즉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그리스인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2절에 나오는 “크게 존경받는 형제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구절 즉 3절에서 “강요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일부 유대교 복귀주의자들 즉 유대교 신앙과 관습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받도록 압력을 가했을 수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행 15:23-29) 여기서 바울이 디도의 경우를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디도는 주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 활동을 했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고후 8:6; 딤후 4:10; 딛 1:4, 5) 따라서 그의 경우는 바울이 할례를 베풀었던 디모데의 경우와는 달랐다.—행 16:3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인: 디도는 그리스인(헬렌)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그가 단지 그리스인의 혈통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1세기의 일부 저술가들은 그리스인은 아니지만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 단어의 복수형(헬레네스)을 사용했다. 이 구절에서는 디도를 그런 넓은 의미로 그리스인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롬 1:16 연구 노트 참조.

거짓 형제들: “거짓 형제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프세우다델포스)는 이 구절과 고후 11:26에만 나온다.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정의한다. 갈라디아 회중들의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은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세했지만 사실은 회중이 다시 모세 율법을 엄격히 따르게 하려고 했다. (갈 1: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이 “슬며시 들어온” 자들, 그리스도인 자유를 “염탐하려고 슬그머니 들어온 자들”이라고 말함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위험한 가르침을 퍼뜨리려고 교묘한 책략을 사용한다는 점을 밝혔다.—고후 11:13-15 비교.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돌아서서: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이 편지를 쓰게 된 중요한 이유를 언급한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곳 회중들의 일부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진리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언급한, 그들을 “미혹한” 사람들 가운데는 (갈 3:1) 회중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자들, 즉 그가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른 자들도 포함되었다. (갈 2:4; 3:1 연구 노트 참조) 그 거짓 형제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이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이었다. (갈 1:13 연구 노트 참조) 그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미 이방인들이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결정했는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행 15:1, 2, 23-29; 갈 5:2-4) 바울은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이 박해가 두려워서 유대인 반대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갈 6:12, 13) 이 거짓 형제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 같으며, 회중들을 바울과 멀어지게 하려고 했다. (갈 1:11, 12; 4:17) 갈라디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도덕을 저지르거나 분쟁을 일으키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을 수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후반부에서 그들을 하느님에게서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육적인 경향에 대해 다룬다.—갈 5:13–6:10.

좋은 소식의 진리: 이 표현은 14절에도 나오는데,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교 가르침 전체를 가리킨다.

하느님: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하느님”으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나 그 밖의 언어들로 옮긴 일부 번역본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뜻을 함께한다는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또는 “동료 관계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그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어떤 일에 동참하거나 동료가 되거나 친교를 맺는다는 표시였다. (왕하 10:15) 기원 49년경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세기 중앙장로회가 할례 문제를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행 15:6-29) 그때 바울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사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행 9:15; 13:2; 딤전 1:12) 여기서 바울은 그 모임과 그 이후에 그들이 나타냈던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떠올린 것이다. 형제들은 그들 모두가 동일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에게 전파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뜻을 모았다.

베드로가: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을 보면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 2:9 연구 노트 참조) 예루살렘의 중앙장로회는 베드로가 주로 유대인에게 전파할 책임을 맡았으며 바울은 주로 비유대인들에게 전파할 책임을 맡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비유대인에게만,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만 전파한 것은 아니었다.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할 길을 처음으로 연 사람은 베드로였다. (행 10:44-48; 11:18) 또한 바울도 많은 유대인들에게 전파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고 …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행 9:15) 두 사람 모두 순종하는 태도로 자기가 받은 사명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후에 베드로는 동쪽으로 가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유대 학문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던 바빌론에서 봉사했다. (벧전 5:13) 바울은 서쪽으로 아주 먼 곳까지 여행하며 선교 봉사를 수행했다. 그는 스페인까지 갔을 수도 있다.

할례받은 사람들: 직역하면 “할례자들”.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직역하면 “무할례자들”. 비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을 베드로에게 주신 … 나에게도 능력을 주셨는데: 그리스어 동사 에네르게오가 여기서는 “능력을 주다”로 번역되었다. 다른 구절들에서는 이 동사가 “활동하다”, “작용하다”, “힘을 주다”로 번역되기도 했다. (엡 2:2; 3:20; 빌 2:13; 골 1:29) 이 구절에서 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베드로와 바울에게 사도로서 활동할 권위만이 아니라 책임을 수행할 능력도 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기둥: 문자적인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 주는 것처럼, 여기서 기둥으로 비유된 사람들은 회중을 지탱해 주고 회중에 힘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로 언급할 때도 사용되었으며 (딤전 3:15) 천사의 불기둥 같은 다리를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계 10:1-3)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마치 기둥처럼, 회중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믿음직하게 회중을 지탱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게바: 사도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고전 1:12 연구 노트 참조.

뜻을 함께한다는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또는 “동료 관계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그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어떤 일에 동참하거나 동료가 되거나 친교를 맺는다는 표시였다. (왕하 10:15) 기원 49년경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세기 중앙장로회가 할례 문제를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행 15:6-29) 그때 바울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사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행 9:15; 13:2; 딤전 1:12) 여기서 바울은 그 모임과 그 이후에 그들이 나타냈던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떠올린 것이다. 형제들은 그들 모두가 동일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에게 전파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뜻을 모았다.

게바: 사도 시몬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 예수께서는 시몬을 처음 만나셨을 때 그에게 게바(그리스어 케파스)라는 셈어 이름을 붙여 주셨다. 게바는 욥 30:6과 렘 4:29에 나오는 히브리어 명사 케핌(바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요 1:42에서 요한은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페트로스. 이 그리스어 이름 역시 “바위”를 의미한다)이다”라고 설명한다. 게바라는 이름은 요 1:42과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 중 고린도 전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온다.—고전 1:12; 3:22; 9:5; 15:5; 갈 1:18; 2:9, 11, 14. 마 10:2; 요 1:42 연구 노트 참조.

관대함을 풍성히 나타냈습니다: 또는 “관대함을 넘치게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의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구호 봉사를 끝마치도록 격려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회중들을 비롯한 “마케도니아의 회중들”이 관대하게 주는 면에서 보인 뛰어난 모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후 8:1-4; 9:1-7; 롬 15:26; 빌 4:14-16) 그 회중들이 기쁜 마음으로 관대함을 나타낸 것이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던 이유는 그들 자신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큰 시험 가운데 고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비난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게는 금지된 관습을 행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을 수 있다. (행 16:20, 21)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이 겪은 시험은 그들의 가난한 상태와 관련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시험 즉 시련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유대의 형제들에게 감정 이입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행 17:5-9; 살전 2:14)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대의 형제들을 돕기 원했으며 ‘자기들의 형편 이상으로’ 기꺼이 베풀었다.—고후 8:3.

모금: “모금”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로기아는 성경에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고전 16:1, 2에 나온다. 문맥과 바울이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을 볼 때 이것은 식품이나 옷이 아니라 돈이었을 것이다. 이 단어 앞에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것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특별한 모금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당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특별히 모은 돈이었을 것이다.—고전 16:3; 갈 2:10.

사람들 편에 여러분의 고마운 선물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기원 55년경에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의 감독 아래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에 있는 회중들은 그들을 위해 구호 기금을 모았다. (고전 16:1, 2; 고후 8:1, 4; 9:1, 2) 기원 56년에 바울이 그 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가는 긴 여행을 떠났을 때 여러 사람이 동행했다. 그들은 여러 회중들이 맡긴 기금을 갖고 있었으며, 각 회중이 바울과 동행할 사람들을 보냈을 수 있다. (행 20:3, 4; 롬 15:25, 26) 그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 여행한 것은 아마도 안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후 11:26) 승인받은 사람들만 바울과 함께 기금을 전달하는 일에 참여했으므로, 그들이 기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기부를 한 사람들은 그 돈이 올바로 사용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고후 8:20.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기원 49년경에 바울과 그의 동료인 바나바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한 가지 임무를 받았다. (갈 2:9) 그들은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는 일을 잊지 말아야 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 왔다고 말한다. 후에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바울은 다른 지역의 회중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가진 물질적인 것들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을 돕게 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은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음을 보여 준다. 그는 고린도 전서와 후서에서 (기원 55년경) 이 기부금에 관해 쓰면서 자신이 이미 “갈라디아의 회중들에게” 이 문제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고전 16:1-3; 고후 8:1-8; 9:1-5. 고전 16:1, 3; 고후 8:2 연구 노트 참조) 기원 56년경에 쓴 로마서에서는 기부금을 모으는 일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롬 15:25, 26) 얼마 뒤 그가 그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은 나중에 그가 로마 총독 펠릭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저는 동족에게 자선기금을 전달하[려고] 돌아왔습니다.” (행 24:17) 그처럼 사랑에서 우러나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1세기 그리스도교를 식별하게 해 주는 한 가지 표였다.—요 13:35.

게바: 사도 시몬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 예수께서는 시몬을 처음 만나셨을 때 그에게 게바(그리스어 케파스)라는 셈어 이름을 붙여 주셨다. 게바는 욥 30:6과 렘 4:29에 나오는 히브리어 명사 케핌(바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요 1:42에서 요한은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페트로스. 이 그리스어 이름 역시 “바위”를 의미한다)이다”라고 설명한다. 게바라는 이름은 요 1:42과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 중 고린도 전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온다.—고전 1:12; 3:22; 9:5; 15:5; 갈 1:18; 2:9, 11, 14. 마 10:2; 요 1:42 연구 노트 참조.

게바: 사도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고전 1:12 연구 노트 참조.

정면으로 반대했습니다: 또는 “대면하여 나무랐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유대인 형제들과 더는 교제하려 하지 않자, 그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바울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를 책망했다. “반대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반대편에 서다”를 의미한다.—갈 2:11-14.

야고보: 예수의 이부동생인 야고보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야고보는 행 12:17에 나오는 야고보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마 13:55; 행 12:17 연구 노트 참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할례 문제를 다룰 때 야고보가 그 모임을 주재한 것 같다. (행 15:1, 2) 바울은 아마도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회중에서 “기둥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했을 것이다.—갈 2:1-9.

하늘 왕국의 열쇠들: 성경에서 문자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열쇠를 받는 사람은 어느 정도 권한을 부여받았다. (대상 9:26, 27; 사 22:20-22) 따라서 “열쇠”라는 말은 권한과 책임을 상징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열쇠들”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행 2:22-41), 사마리아인들에게(행 8:14-17), 이방인들에게(행 10:34-38) 하느님의 영을 받고 하늘 왕국에 들어갈 기회를 열어 주었다.

얼마나 불법적인 일인지는: 베드로가 살던 시대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의식상 부정해진다고 가르쳤다. (요 18:28) 하지만 모세 율법에는 그러한 행동을 금하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시고 새 계약이 발효되었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장벽은 사라졌다. 그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엡 2:11-16) 하지만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에도 초기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의 의미를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해가 지나서야, 자신들이 이전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웠고 자신들의 문화에 뿌리박혀 있던 태도를 벗어 버릴 수 있었다.

이방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것은 친교를 나눌 기회였으며 식사할 때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보통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남아 있던 이방 민족들과 결코 섞여서는 안 되며 그들의 신들을 언급해서도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수 23:6, 7) 하지만 기원 1세기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부가적인 제한 규정들이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한 규정들에 따르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의식상 부정해졌다.—요 18:28.

할례받은 그 사람들: 직역하면 “할례에서 나온 사람들”. 예루살렘 회중에서 온 몇몇 할례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다른 구절들에서는 이 그리스어 표현이 “할례를 지지하는 사람들”, “할례받은 사람들”, “할례에 고착하는 사람들”로 번역되었다.—행 11:2; 골 4:11; 딛 1:10.

더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 사람들을 멀리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베드로는 기원 36년에 “하늘 왕국의 열쇠들” 중 세 번째 열쇠를 사용하여, 고넬료와 그의 집안이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교 개종자도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될 기회를 열어 주었다. (마 16:19 연구 노트 참조) 당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그러는 동안 틀림없이 그 집에 살던 이방인들과 여러 차례 함께 식사를 했을 것이다. (행 10:48; 11:1-17)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연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약 13년 뒤 시리아 안티오크에 있을 때 베드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온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던 야고보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행 15:13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은 변화를 신속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모세 율법과 몇몇 유대 관습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행 10:28 연구 노트 참조) 베드로가 한 행동은 그가 시리아 안티오크를 방문한 때와 같은 해인 기원 49년경에 중앙장로회가 내린 결정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중앙장로회는 그 결정을 통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세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미 확증한 바 있었다. (행 15:23-29) 여기서 바울이 안티오크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 것은 베드로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를 따라서 그런 가식적인 행동을 했으며 … 가식적인 행동에 휩쓸렸습니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시니포크리노마이와 명사 히포크리시스는 어근이 같다. 두 단어 모두 원래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그리스의 배우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나오는 “가식적인 행동”이라는 표현은 명사 히포크리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명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6번 나오는데,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구절들에서는 “위선”으로 번역되었다. (마 23:28; 막 12:15; 눅 12:1; 딤전 4:2; 벧전 2:1. 이와 어근이 같은 단어인 히포크리테스[“위선자”]에 대해 알아보려면 마 6:2; 눅 6:42 연구 노트 참조) 일부 사전에 따르면 “~를 따라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연기에 참여하다” 또는 “위선에 참여하다”를 의미하며, 이 구절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위선자여!: 그리스어 히포크리테스는 원래 그리스(또한 훗날 로마)의 배우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배우들은 얼굴을 가려 주고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게 해 주는 커다란 가면을 썼다. 이 단어는 후에 비유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가식적인 행동으로 본래의 의도나 성격을 숨기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마 6:5, 16에서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이 구절(눅 6:42)에서 그분은 자신의 결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결점에 초점을 맞추는 제자는 누구나 위선자라고 하신다.

위선자들: 그리스어 히포크리테스는 원래 그리스(또한 훗날 로마)의 배우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배우들은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게 해 주는 커다란 가면을 썼다. 이 단어는 후에 비유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속임수를 쓰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여 본래의 의도나 성격을 숨기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신다.—마 6:5, 16.

게바: 사도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고전 1:12 연구 노트 참조.

게바: 사도 시몬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 예수께서는 시몬을 처음 만나셨을 때 그에게 게바(그리스어 케파스)라는 셈어 이름을 붙여 주셨다. 게바는 욥 30:6과 렘 4:29에 나오는 히브리어 명사 케핌(바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요 1:42에서 요한은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페트로스. 이 그리스어 이름 역시 “바위”를 의미한다)이다”라고 설명한다. 게바라는 이름은 요 1:42과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 중 고린도 전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온다.—고전 1:12; 3:22; 9:5; 15:5; 갈 1:18; 2:9, 11, 14. 마 10:2; 요 1:42 연구 노트 참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동사 디카이오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명사들인 디카이오마디카이오시스는 일반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다”, “의로운 행위”로 번역된다. 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혐의든 없애 주는 것, 무죄로 간주하는 것, 따라서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롬 3:24 연구 노트 참조) 갈라디아 회중들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을 따르는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갈 5:4. 갈 1:6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근거를 마련하셨다.—롬 3:19-24; 10:3, 4; 갈 3:10-12, 24.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돌아서서: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이 편지를 쓰게 된 중요한 이유를 언급한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곳 회중들의 일부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진리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언급한, 그들을 “미혹한” 사람들 가운데는 (갈 3:1) 회중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자들, 즉 그가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른 자들도 포함되었다. (갈 2:4; 3:1 연구 노트 참조) 그 거짓 형제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이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이었다. (갈 1:13 연구 노트 참조) 그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미 이방인들이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결정했는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행 15:1, 2, 23-29; 갈 5:2-4) 바울은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이 박해가 두려워서 유대인 반대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갈 6:12, 13) 이 거짓 형제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 같으며, 회중들을 바울과 멀어지게 하려고 했다. (갈 1:11, 12; 4:17) 갈라디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도덕을 저지르거나 분쟁을 일으키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을 수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후반부에서 그들을 하느님에게서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육적인 경향에 대해 다룬다.—갈 5:13–6:10.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명사들인 디카이오마디카이오시스는 일반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다”, “의로운 행위”로 번역된다. 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혐의든 없애 주는 것, 무죄로 간주하는 것, 따라서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서 해방된[디카이오오의 한 형태]” 것이라고 썼다. 죽음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롬 6:7, 23) 또한 이 그리스어 단어들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믿음을 나타내는 불완전한 사람을 무죄로 여기시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행 13:38, 39; 롬 8:33.

범법을 드러내기 위해: 바울은 모세 율법의 주된 목적이 “범법을 드러내는” 것,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앞에 불완전한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범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롬 4:15 연구 노트 참조) 율법은 죄의 범위와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으로 밝혀 주었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이 범죄와 죄가 “많아지게”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율법이 많은 행동과 심지어 태도까지도 죄가 되는 것으로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롬 5:20; 7:7-11. 고전 15:56 연구 노트 참조. 시 40:12 비교)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죄 많은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 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율법에서 규정한 희생 제물들은 그들이 죄 많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일깨워 주었다. (히 10:1-4, 11)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죄를 온전히 속죄해 주는 완전한 희생 제물이 필요했다.—롬 10:4. 이 구절에 나오는 자손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내가 이미 헐어 버린 것을: 바울은 한때 모세 율법을 따르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유대교에 열심이었다. (갈 1:13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비유적으로 말해 헐어 버렸다. (갈 2:15, 16)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갈 1:9; 5:2-12) 여기서 바울은 만약 자신이나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모세 율법의 영향력 아래 다시 들어간다면, “이미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렇게 한다면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되어 다시 자신을 범법자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었다.—갈 3:19 연구 노트 참조.

유대교: 바울 시대에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따랐던 종교 제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갈 1:13, 14에만 나온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철저하게 따른다고 주장했지만, 1세기의 유대교는 “조상의 전통”에 큰 비중을 두었다. (갈 1:14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그러한 전통을 배척하셨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든 사람들을 질책하셨다.—막 7:8, 13.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신분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 말을 했다. (갈 2:16) 모세 율법은 바울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정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롬 7:7-11)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 계약은 예수께서 형주에서 죽으심으로 법적 효력을 상실했다. (골 2:13, 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해서 죽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롬 7:4)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믿음을 나타냄으로 “율법에 대해 죽게” 되었다. 율법은 바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으므로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갈 3:24; 3:25 연구 노트 참조.

믿음이 이르렀으므로: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하신 유일한 분이었다. 그분을 통해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 즉 완전한 믿음이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여호와 하느님 앞에서 승인받은 신분을 누릴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우리 믿음의 완성자’가 되셨다. (히 12:2)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제도의 종결까지 모든 날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었다. (마 28:20) 따라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보호자의 돌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갈 3:2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이 믿음이 이른 후로는 모세 율법이 효력을 잃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 바울이 이 비유 가운데서 사용한 “보호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파이다고고스)는 문자적으로 “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가정 교사”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갈 3:24, 25과 고전 4:15에만 나오는데, 고전 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을 그러한 보호자에 비유했다. (고전 4:15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모세 율법을 남자아이를 매일 학교에 데려가는 보호자 또는 가정 교사에 비한다. 그러한 보호자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가 가정 내의 규칙이나 표준을 따르도록 돕고, 징계를 베풀 책임이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모세 율법은 하느님의 표준을 철저히 옹호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죄 많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이 “보호자”의 인도를 받아들인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유일한 수단인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행 4:12.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신분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 말을 했다. (갈 2:16) 모세 율법은 바울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정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롬 7:7-11)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 계약은 예수께서 형주에서 죽으심으로 법적 효력을 상실했다. (골 2:13, 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해서 죽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롬 7:4)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믿음을 나타냄으로 “율법에 대해 죽게” 되었다. 율법은 바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으므로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갈 3:24; 3:25 연구 노트 참조.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또는 “그를 믿는”. 그리스어 동사 피스테우오(명사형인 피스티스는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번역됨)는 기본적으로 “믿다; 믿음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문맥과 문법 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많은 경우 이 단어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거나 인정하는 것에 더해 (약 2:19)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심이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 3:16에서 그리스어 동사 피스테우오는 전치사 에이스(직역하면 “안에”)와 함께 사용되었다. 한 학자에 따르면 동사 피스테우오와 전치사 에이스가 결합된 이 표현은 “어떤 행위, 즉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서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 그리스어 초급 문법」[An Introductory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폴 L. 코프먼, 1982년, 46면) 예수께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믿음을 단 한 번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나타내는 것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요 3:36에도 “아들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는 “아들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것과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 문맥에서 “믿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순종을 통해 강한 신념이나 믿음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강권합니다: 이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하나로 뭉쳐 있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지속적인 힘을 행사하다”; “권고하다”; “강하게 촉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심으로 나타내신 사랑은 참으로 탁월하다. 그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울의 모든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사랑은 바울의 마음을 움직여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하느님과 회중 안팎의 사람들을 섬기는 일만을 목표로 살아가게 만들었다.—고전 9:16 연구 노트 비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둥에 못 박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어 동사 신스타우로오는 문자적으로 예수와 함께 처형된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 27:44; 막 15:32; 요 19:32. 롬 6:6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다. (갈 3:13; 골 2:14)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처형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냄으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된다.—롬 10:4; 고후 5:15. 갈 2:19 연구 노트 참조.

육체로 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신: 여기서 바울은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예수에게 믿음을 나타내기로 선택하는 사람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이 주는 유익을 강조한다. (요 3:1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큰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이해했으며 그 사랑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사랑에 마음이 감동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따뜻하고 관대한 태도를 나타내게 되었다. (고후 5:14 연구 노트 참조. 고후 6:11-13; 12:15 비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도 예수께서 자신을 이끌어 제자가 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바울은 예수께서 의로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에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내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이해했다. (마 9:12, 13 비교)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대속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분과 함께 기둥에 못 박힌: 복음서에서 그리스어 동사 신스타우로오는 문자적으로 예수와 함께 처형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마 27:44; 막 15:32; 요 19:32)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에서 예수께서 기둥에 달려 처형되신 일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고전 1:13, 23; 2:2; 고후 13:4)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이 그리스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들의 옛 인간성을 죽였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이 단어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여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둥에 못 박혀 있습니다”라고 썼다.—갈 2:20.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 즉 모세 율법을 따르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명의 선물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저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롬 11:5, 6; 갈 5:4.

미디어

시리아 안티오크—초기 그리스도인 활동의 중심지
시리아 안티오크—초기 그리스도인 활동의 중심지

시리아 안티오크는 로마 속주 시리아의 수도였다. 1세기에 시리아 안티오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였다. 안티오크는 오론테스강(1)의 동쪽에 세워진 도시였으며 원래는 그 강에 있는 섬(2)도 도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강 하류에는 셀레우키아 항구가 있었다. 안티오크에는 경마와 전차 경주를 위한 경기장(3)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에 규모가 가장 큰 경기장 중 하나였다. 안티오크는 주랑이 있는 웅장한 거리(4)로 유명했는데, 헤롯 대왕이 그 거리를 대리석으로 포장했다. 나중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지붕이 있는 주랑을 세웠으며 거리를 모자이크와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던 이 도시에는 규모가 큰 유대인 공동체(5)가 있었다. 이 공동체에 속해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안티오크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행 11:26)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이방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기원 49년경에 할례 문제가 제기되자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하는 대표단을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장로회에 보내 지침을 구하게 했다. (행 15:1, 2, 30) 사도 바울은 안티오크를 근거지로 하여 세 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했다. (행 13:1-3; 15:35, 40, 41; 18:22, 23) 이 지도에는 여러 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도시 성벽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